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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2 | +title: 내 마음 나도 몰라 |
| 3 | +date: 2023-03-31 |
| 4 | +author: Kihong Heo |
| 5 | +kor_author: 허기홍 |
| 6 | +tags: |
| 7 | + - 진로 |
| 8 | +classes: wide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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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10 | + |
| 11 | +## 0. 들어가며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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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13 | +학생들, 특히 학부생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면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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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15 | +<b><i>“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.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진로를 설계 할지 걱정이에요.”</i></b> |
| 16 | + |
| 17 | +늘 난감했다. 무언가 조언을 해주고 싶은데 번뜩 떠오르지가 않았다. 나는 이제껏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. |
| 18 | +이번 학기 학부 지도학생과 만남을 준비하면서 미리 상의하고 싶은 질문을 조사했더니 |
| 19 | +어김없이 많은 학생이 위와 같은 이야기를 적어냈다.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만은, |
| 20 | +그 흔들리는 꽃에 약간의 거름이라도 될까하여 이 참에 생각을 정리해볼까 한다. |
| 21 | + |
| 22 | +대체 나는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는가? 어떤 일을 직접 해보기전에 그 일이 내 천직임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. |
| 23 | +모든 일이 그러한 것처럼 현재까지 관찰한 정보를 바탕으로 최선을 다해 미래를 예측해 볼 뿐이다. 그때 나는 어떻게 했었던가? |
| 24 | +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래 세 가지가 컸던 것 같다. |
| 25 | +- 작은 즐거움에 귀 기울이기 |
| 26 | +- 싫다고 크게 외치기 |
| 27 | +- 자신있게 저지르기 |
| 28 | + |
| 29 | + |
| 30 | +## 1. 작은 즐거움에 귀 기울이기 |
| 31 | +본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당신. 혹시 무언가 거창한 것이, 한 번에 마음 깊숙이 꽂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된다. |
| 32 | +너무 큰 기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. 적어도 내가 본 세상에서 그런건 없었다. 대학교 교수가 내 일생을 바칠 천직임을 뇌리에 한 방에 박히게 할만큼 |
| 33 | +큰 사건은 없었다. 단지 순간 순간 느낀 작은 즐거움을 빵 부스러기 주워 먹듯이 따라오다가 도착한 곳이 여기였을 뿐이다. |
| 34 | +생각해보자. 내 삶을 통틀어 행복했던 순간에 있던 것들은 무엇인가? 그것들을 따라 가보면 어떤 곳이 나올까? |
| 35 | + |
| 36 | +내가 즐거웠던 순간들을 돌이켜보면 정성들여 내 이름을 건 작품을 만들던 때가 떠오른다.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나는 레고를 아주 좋아했다. |
| 37 | +널부러져있는 조각들을 혼자 힘으로 하나하나 조립해서 최종본을 만들 때 느낀 즐거움이 시작이었다. 10대가 되고 컴퓨터를 만지면서 부터는 |
| 38 | +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에 자연스레 관심이 갔다. 내 힘으로 만든 첫 프로그램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. 초등학교 5학년 때 비주얼 베이직으로 작성한 `폴의얼굴.exe` 라는 프로그램이었다. |
| 39 | +마우스로 버튼을 누르면 철권이라는 게임의 캐릭터인 폴의 얼굴이 화면에 뜨는 간단한 프로그램이었다. 명령어의 의미도 모른채 책만 보고 몇날 며칠에 걸쳐 만든 |
| 40 | +프로그램이다. 내 계속된 자랑에도 친구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지만,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혼자 힘으로 해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. |
| 41 | +20대에는 음악을 만드는데 잠시 빠져있었다. 다행히 별로 재능이 없다는 것을 일찍 깨닫고 그만 두었지만, 혼자 힘으로 악보를 만들고 녹음을 하느라고 |
| 42 | +새벽을 맞이한 적도 많았다. 30대에 들어설 때 쯤에는 술을 내 손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. 장독을 하나 사서 책을 찾아보며 막걸리를 만들기 시작했다. |
| 43 | +전문가의 작품에 비하면 맛이 그리 신통치는 않았지만, 내 정성이 깃든 맛을 나는 즐길 수 있다. 연구를 하는 것도 이러한 연장선이다. |
| 44 | +내가 찾은 문제, 공을 들여 만든 해결 방법과 프로그램 모든 것에 내 정성과 사연이 깃들어 있다.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내 이름을 건 논문이 출판될 때면 그래서 너무나 즐겁다. |
| 45 | +학계는 이런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자기 자랑할 수 있는 자리 (학회) 도 마련해준다. |
| 46 | +이 중독성은 끊기가 어렵다. |
| 47 | + |
| 48 | +두번째 요인은 단순히 대학이라는 공간이 주는 즐거움이었다. 괴로웠던 고등학교 생활을 마치고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때 그 기분을 잊지 못한다. |
| 49 | +세상이 흑백 텔레비전에서 컬러 텔레비전으로 바뀐것 같은 신선함이었다. 넓은 캠퍼스를 가득 메운 젊음과 열정을 느끼는 즐거움은 4학년이 되어도 전혀 사그라들지를 않았다. |
| 50 | +여기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. 어떻게 하면 평생 캠퍼스에 지박령처럼 눌러 앉을 수 있을까? 구체적으로 대학교수라는 직업을 생각하게 된건 그 때부터이다. |
| 51 | +아하. 캠퍼스 지박령이 되려면, 교수가 되면 되겠구나. 교수가 되려면 대학원에 가야되는 구나. 그렇게 아무런 고민 없이 대학원 원서를 써냈다. |
| 52 | + |
| 53 | +지박령이 되는 여러 경로 중 프로그래밍언어라는 분야를 택한 것도 즐거웠던 기억의 부스러기를 따라갔기 때문이다. 아마 대부분 대학원생들이 그럴테지만 |
| 54 | +가장 재미있게 들었던 과목이 영향을 많이 끼친다. 대학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과목이 프로그래밍 언어와 컴파일러였다. 특히 다른 과목에 비해 |
| 55 | +이 과목의 숙제를 하고 있노라면 20년 전 레고만들던 때로 돌아간 것 같이 즐거웠다. 명령을 하나하나 재귀적으로 조립하여 큰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그랬다. |
| 56 | +그 아무리 재미있는 MT나, 그 아무리 중요한 시험 전날이어도 도저히 밤을 새지 못하는 내가 호기심에 밤을 지샜던 순간이 몇번 있었다. |
| 57 | +당연히 큰 고민 없이 그 길로 향했다. |
| 58 | + |
| 59 | +이렇듯 즐거움의 조각들을 모으고 모으다 보면 공통점이 보이고, 여러 선택지의 답이 자연스레 정해질 것이라 믿는다. |
| 60 | +나는 일관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였다. 지금 내가 즐거워 하는 것들, 즉 멋진 캠퍼스로 매일 출근하고, 내 이름을 건 논문을 출판하고 |
| 61 | +강의를 개설하고 대학원생을 배출하는 것들은 돌이켜보면 그 옛날의 즐거움과 일맥상통한다. 단지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다른 형태로 발현된 것일 뿐이다. |
| 62 | +여기까지 오는 선택을 하면서 대단한 계시를 받은 적은 없다. 이 일 아니면 내 인생이 의미 없다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. |
| 63 | +선택을 하는데 이유가 거창할 필요는 없다. 작지만 마음이 진정으로 동하는 즐거움을 나열해보고 그 교점에 있는 미래를 그려보기를 권한다. |
| 64 | + |
| 65 | +## 2. 싫다고 크게 외치기 |
| 66 | +본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당신. 그러면 혹시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궁금하다. 딱히 좋은 선택지가 없다면 싫어하는 것을 피하는 |
| 67 | +방법도 좋은 전략이라고 말해주고 싶다. |
| 68 | + |
| 69 | +나는 어릴 때부터 외우기를 지독히 싫어했다. 이른바 암기과목은 늘 전체 성적을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렸다. 나같이 암기를 싫어하는 귀차니스트들은 |
| 70 | +핵심 원리 몇 개만 파악하여 무한히 많은 현상을 해석하는 게으름을 즐긴다. 따라서, 수학과 과학은 내게 보석같은 과목이었다. 과학중에서도 생물과 지구과학은 |
| 71 | +조금 정이 덜가고 물리나 화학이 제격이다. 이 때문에, 자연스레 최대한 암기가 필요없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. 그러므로, 문과 이과 중에서 문과는 탈락. |
| 72 | +이과 중에서도 의학 계열은 탈락. 직업도 무언가를 외워서 입사 시험보는 방향은 탈락. 그렇게 공학 계열, 연구 직군이 남았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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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74 | +외우기를 싫어하는 까닭에 기억력으로 승부하기 보다는 꾸준히 쌓아올린 결과물로 결판 내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. 대표적으로 프로그래밍이 그랬다. |
| 75 | +단기간에 지식을 외워서 맞히는 것은 별로 자신이 없다. 반면 남들보다 더 오랜 시간을 투자하고 더 많이 시행착오를 겪어서 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|
| 76 | +승부는 즐긴다. 아무것도 억지로 외우지 않아도 된다. 집중하고 시간을 투자하면 자연스레 원리가 머리속에 들어온다. |
| 77 | +잠시 딴 짓하다가 와도 걱정이 없다. 내 기억은 날아 갔을 지언정, 내 프로그램 코드는 그대로 |
| 78 | +남아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. 그동안 내가 외운것을 까먹었을까 다시 기억력 테스트를 하는 불안함이 없다. 연구와 논문도 마찬가지이다. 고시는 한 번 떨어지고 재수를 할때 |
| 79 | +그간 외운 많은 것들이 기억에서 사라진다. 그 해에 60점을 받고 떨어졌다고 하여, 재도전시 60점부터 시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. 0점부터 재시작이다. |
| 80 | +반면, 학계에서 논문이 비록 채택되지 않더라도, 떨어진 그 자리에서 고스란히 재도전할 수 있다. 모든 연구 결과가 거기 그대로 있다. 그렇게 연구하는 길로 자연스레 이끌렸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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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82 | +많은 경우 긍정적인 것을 추구하기보다 부정적인 것을 회피하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. 재미있는 일이 전혀 없어도 세상은 살만하지만, 손톱밑에 가시가 박힌채로 |
| 83 | +사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다. 본인에게는 어떠한 가시가 있는지 생각해보고 이를 피하는 미래를 그려보기를 권한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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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85 | +## 3. 자신있게 저지르기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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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87 | +본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당신. 혹시 고민이 될 만한 몇 가지 선택지는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. 크게 나쁘지 않은 선택지가 몇 개 있다면, |
| 88 | +아무거나 빨리 선택해서 한번 직접 경험해보는 것도 좋은 전략일 수도 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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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90 | +점심으로 짜장면과 짬뽕이 둘다 먹고 싶지만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? 내 전략은 늘 이렇다. 길게 고민하지 말고 아무거나 주문해서 빨리 먹고 배고픈 시간 최소화 하기. |
| 91 | +어차피 짜장면 먹고 나면 별로 짬뽕 생각 안날 것이다. 만약 여전히 짬뽕이 먹고 싶다면? 저녁에 먹으면 된다. 인생은 길다. |
| 92 | + |
| 93 | +박사 학위를 마칠 때 쯤, 회사로 갈것인가 대학 연구원으로 갈것인가 잠시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. 어디로 가든지 나중에는 대학교에 교수로 가고 싶었지만 중간 과정을 어디로 두어야 할지가 고민이었다. |
| 94 | +대학 연구원으로 간다면 온전히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. 다만, 새로운 팀에 가서 적응해야하고, 정직원이 아닌 계약직 연구원이라는 단점도 있다. |
| 95 | +반면, 당시 고려하던 회사와는 몇 달간 같이 일을 해오던 참이었다. 큰 회사에 정직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안정적이기도 했고, 연구를 장려하는 분위기도 있어서 향후 학계로 가는데 큰 걸림돌은 아닐 수도 있었다. |
| 96 | +만일 대학교에 자리를 잡지 못할 경우 그 회사에서 오래 경력을 유지할 수도 있었다. 하지만, 아무리 그래도 회사는 회사라 개인의 연구보다는 전체 집단의 이익이 향하는 곳으로 가야할 것이라 예상했다. 며칠 고민하고 대학 연구원으로 가는 것으로 정했다. |
| 97 | +어디든 가보기 전까지는 어떨지 모를 것이라 더 오랜 고민은 소화불량만 부를 것이라 보았다. 어디를 가든 내가 잘하면 좋은 일이 있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고 대학 연구원을 해보다가 정 불편하면 그때 회사로 갈 수도 있으니까. |
| 98 | +그렇게 훌쩍 떠나고 난 이후에는, 일에 몰두하느라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. 다행히 그 이후에 내가 원하는 일이 잘 풀려서 지금까지 행복하게 지내고 있지만, 그 당시에 계획대로 안되었더라도 크게 내 인생이 아작나지는 않았을 것이라 본다. |
| 99 | +또 어딘가에서 다른 즐거움을 찾으며 살고 있었을 테니까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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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101 | +비슷한 선택지 앞에서 길게 고민하기 보다는 아무 선택지나 고른 후 아낀 시간을 성장에 쓰는게 나을 때가 있다. 그 시간을 정말 알차게 썼다면, 설사 그 선택이 잘 안풀렸을지라도 |
| 102 | +다음 기회가 꼭 다시 올 것이라 믿는다. 늘 완벽한 선택을 하려고 기를 쓰지말고 가끔은 운에 맡겨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. 다만 주사위를 던진 이후에는 꼭 가열차게 뛰어서 아낀 시간이 헛되지 않기를 권한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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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104 | +## 4. 마무리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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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106 | +내 단편적인 경험이 진리가 될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한 가지 사례 연구로는 괜찮지 않을까 하여 풀어보았다.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면 언제든 연락을 바란다. 또한 더 경륜이 있는 분의 이야기도 많이 들어보길 권한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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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108 | +많은 경우 답은 이미 내 안에 있는게 아닌가 한다. 다만, 너무 어깨에 힘들어간 나머지 펀치가 안나가는게 아닐까? 생각은 깊게, 고민은 짧게, 선택은 자연스럽게, 노력은 가열차게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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